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자르 왕조 (문단 편집) == 평가 == '''5,000년 이란 역사상 최악의 국가.''' 카자르 왕조의 존속 시기가 하필이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절정을 찍던 [[19세기]]와 [[20세기]]인 탓에 어떤 왕조가 버티고 있었더라도 후대인들로부터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 타이밍이긴 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카자르 군주들은 지나칠 정도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웠다.''' 카자르 왕조의 왕공들은 성직자 계급과 결탁해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패가 만연하였으며, 대외 무역에도 실패했고 외세에 연패하며 막대한 영토를 뜯기고 반쯤 식민화되었다. 카자르 왕조는 [[근대화]]에 대한 개혁 의지를 보였지만 결코 충분하지 못했다. 4대 샤인 나스레딘 샤의 재위기에 대재상 아미르 카비르가 열성적인 현대화 개혁을 추진했고 일정 부분 성과도 보였지만, 이에 반발한 기득권층들이 샤를 꼬드겨 아미르 카비르를 쫒아내면서 미약한 개혁의 움직임마저 스스로 박살내버렸다. 아미르 카비르가 실각한 이후 카자르 왕조는 서구 기술이나 교육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폐쇄적이고 정체된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아미르 카비르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 '다르 올 포눈'은 그가 쫒겨난 직후 신하들의 건의로 문을 닫을 위기까지 몰렸을 정도였고 아미르 카비르가 기껏 마련해놓은 세수 개혁은 세리들이 어떻게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뒷구멍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카자르 왕조가 가장 욕을 먹어 마땅한 부분은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사치를 위해 아낌없이 이권을 내다 팔았다'''라는 점이다. 물론 망해가는 나라의 지배층들이 멍청하게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퍼주는 일은 지구 어디에서나 일어났던 일이지만 카자르 왕조의 경우 정도가 많이 심했다. 전국민이 골초인 나라에서 '''50년 동안의 담배 전매권'''을 뇌물 몇 푼 받고 영국인에게 팔아치우질 않나, 1900년대에 [[석유]]가 발견되자 '''샤의 유럽 여행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60년 간 국토 대부분에서 석유를 무상 독점 채굴할 권리'''를 [[BP plc|영국에게 팔아먹는 초대형 삽질]]을 터뜨리는 등 카자르 왕조의 무지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눈에 봐도 중요할 것 같은 이권들을 아무 생각 없이 팔아버리는 왕조였으니 무역권, 광산 채굴권, 철도, 전신 부설권 같은 웬만한 이권들은 있는대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에게 헐값으로 팔아제꼈다. 카자르 왕공들은 이 돈으로 사치품을 수입하고 호화사치를 누리기에만 바빠서 근대화를 할 역량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차라리 [[군사력]]이라도 강했으면 몰랐겠지만 카자르 왕조는 군사력도 터무니없이 약했다. 부족 사회 성향이 강했던 페르시아 특성상 중앙 정부의 군사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긴 했지만, 나라 경제가 망해가고 국고가 텅텅 비어가던 상황이라 있던 군사력도 사라지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850년대 페르시아의 중앙상비군은 '''3,000여 명'''이 끝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의 반독립적인 자치군이나 [[자경단]]이었다. [[해군]]도 별다를 바 없었다. 옛 [[나디르 샤]] 시절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 페르시아 해군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철덩어리로 전락해 버려졌으며, 카자르 정부는 해군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해군에 별다른 신경을 쏟지 않았다. 그나마 순양함 '페르세폴리스'와 경비정 '수사'를 [[독일]]에서 사왔지만 숙련병 부족과 경제난으로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퇴역시켰다.[* 두 척의 군함 모두 [[팔라비 왕조]] 때 제적, 스크랩처리되었다.] 그나마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최초로 창설한 근대식 군대가 '코사크 여단'이었다. 페르시아 내의 유일한 정예 병력으로 약 3천 명의 규모를 유지했다. 그러나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코사크 여단은 오히려 나중에 [[레자 샤 팔라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는(...) 기반이 되어버린다. 마치 [[청나라]]의 [[북양함대]]와 비슷한 느낌. 카자르 왕조에 대한 현대 [[이란인]]들의 인식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다. '무능하고 부패했던 데다가 외세에 휘둘리며 영토를 빼앗긴 저주받은 왕조' 정도가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구한말]] [[조선]]에 대한 인식을 부정적으로 극대화시킨 수준'''에 가깝다. 그나마 팔라비 왕조는 이란 내에서도 그때가 현 이란 정부보다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분위기라도 있지, 카자르 왕조 시절은 그리워하는 사람도 없다. [[이란 혁명]]과 상관없이 모든 쪽에서 까이고 다니는 신세인 것이다. 이란 혁명 이후 국외로 도피, 망명 중인 황족들에 대해 현 이란 정부에서 귀국이나 입국 허용조차 불허하고 있는 팔라비 왕가와는 달리 카자르 구 왕가의 후예들은 이란 정부에게 정치적 탄압을 받지 않으며 이란 국내에서도 시민권자로 생활하고 있다. 어차피 아무도 카자르 왕조의 복귀를 바라지 않으니 이런 자비로운 처우가 가능한 것이다. 여러모로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파탄 국가들을 연상시키는 왕조였지만 서구 열강 입장에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었다. 본의 아니게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왕조이기도 한데, 1900년대 초반에 영국인 사업가에 의해 발견되어 영국이 카자르 왕조에서 거의 공짜로 뽑아쓴 석유[* 그리고 이 석유를 뽑아대던 기업은 훗날 영국의 대표적인 에너지 기업 [[BP plc|BP]]의 전신이 된다.]가 영국을 비롯한 [[협상국]]의 1차 대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당시 영국에서는 따로 유전지대를 갖춘 식민지도 없었을 뿐더러(나이지리아의 유전은 195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는 가격도 비싼데다가 그마저도 [[독일 제국 해군]]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문에 충분한 양을 공급받기 힘들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